로켓 동력에 의한 우주 개발이 시작된 이래 그 주요 목표의 하나는 달의 탐사였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인공위성이 궤도를 돌고 난 이후, 미국과 구소련은 달 탐험을 목표로 우주개발 경쟁을 벌였다. 이후 한동안 달 탐사가 중지되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일본·중국·인도를 중심으로 다시 재개되었다.
오는 2020년부터 세계 각국에서 달 유인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활발하다. 유럽우주국, ESA의 국장 디트리히 뵈르너는 미 우주 심포지움에서 달 정거장 건설을 강하게 어필하기도 하였다.http://kweisar.com/582/
달탐험차, 1972년 아폴로 17호 임무
미국은 1958년 달을 목표로 파이어니어 1호를 발사했으나, 달까지 비행하는 데에 실패하고 2호도 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달 탐사에서 1961년 8월 23일 발사된 탐사 우주선 레인저 1호에서 6호까지 계속 실패하였다.
1964년 7월 28일에 발사한 제7호에서 텔레비전 카메라에 의한 달면 관측에 성공, 달에 충돌할 때까지 4,308장의 월면 사진을 지상으로 보냈다. 1966년 5월 30일에는 서베이어 1호를 발사하여 월면에 연착륙시켰고, 또한 루나 오비터 1호도 같은 해 8월에 달 상공을 도는 위성이 되었다. 1967년 11월 7일에 쏘아올린 서베이어 6호는 월면에 연착륙하고 나서 역추진 로켓을 작동시켜 다시 이륙,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등의 복잡한 실험에 성공하였다.
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항공우주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달 탐사계획이다.
1968년 10월 12일, 3명의 우주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7호를 케이프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하여 달 비행 연습을 위해 11일간 지구를 돌면서 우주선의 성능과 조작을 테스트했다. 새턴 1B형으로 발사하였고, 후에 더 큰 새턴 V가 사용되었다.
1969년에는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였고, 승무원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딛고 지구로 귀환하였다.
루나 계획
1959년 1월 2일에 구소련이 쏘아올린 루나 1호는 달면에서 약 6,000 km 떨어진 곳을 통과하였고, 같은 해 9월 12일에 발사한 루나 2호는 인공 물체를 월면에 충돌시켰다. 역시 같은 해 10월 4일에 비행한 루나 3호는 그 때까지 인간이 바라본 적이 없는 달의 뒤쪽을 사진으로 촬영하여 지상으로 전송하는 데 성공했다.
1965년 5월 9일에 발사한 루나 5호로 월면에 관측선을 연착륙(軟着陸)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여 달에 충돌했다. 이듬해인 1966년 1월 31일에 지구를 출발한 루나 9호는 착륙에 성공하여 월면에서 텔레비전 카메라 등으로 관측을 하고 3일간에 걸쳐서 데이터를 지구로 보냈다. 같은 해 3월 31일에 구소련이 쏘아올린 루나 10호는 처음으로 달 주위 궤도를 도는 위성이 되어 상공에서 월면을 탐사하는 데에 성공했다. 1968년 9월 15일에 구소련이 발사한 존드 5호는 달을 돌고 나서 6일 후에 인도양으로 되돌아옴으로써 구소련의 유인 달 비행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하지만, 구소련은 결국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지는 못했다.
이후 루나 16호, 루나 20호, 루나 24호가 달 암석 샘플을 채집하여 귀환하였다.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에 의해 여러 차례 상징적인 깃발이 뿌려지거나 꽂혔지만, 어느 나라도 달표면의 일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와 미국은 달을 공해(公海)와 같은 관할로 여기는 '우주 조약(Outer Space Treaty)'에 가입하고 있다. 이 조약은 또한 달을 평화적인 용도로 사용하도록 제한하여, 군사시설이나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을 위한 무기를 설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달의 자원을 어느 한 국가가 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달 조약(Moon Treaty)'이 제안되었으나, 우주 개발에 참여하는 어느 국가도 참여하지 않았다.